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바그너/생애 (문단 편집) == 습작 시대 == [[1832년]]에 바그너의 정규 음악교육은 끝났다. 바그너는 이제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낼 정도로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했고 몇 작품은 고향에서 연주도 했다. 그때까지 최대의 야심작이던 ‘C장조 교향곡’을 끝낸 뒤 바그너는 더 앞으로 나가기로 한다. 자기 작품 몇개를 들고 빈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의 빈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 [[왈츠]]에 파묻혀 다른 음악은 들리지 않았고 바그너는 이런 분위기에 실망하며 [[1827년]] 친구의 여동생 제니가 있는 다시 가보고 싶었던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갔다. 제니는 부유한 파흐타 [[백작]]의 딸 중 하나로 아주 아름다웠다. ||<#000000><:>[[교향곡|{{{#white '''19살에 작곡한 C장조 교향곡'''}}}]]|| || {{{#!folding [ 영상 펼치기 · 접기 ] ||[youtube(RJNNJTRD1GQ)]||}}} || [[1832년]] 말, 19세의 바그너는 바로 이 집에 찾아갔고 거기서 바그너 인생 최초의 정규 오페라 ‘결혼’(Die Hochzeit)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파흐타 백작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바그너는 평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고 그 대상은 백작의 두 딸 중 키가 더 크고 짙은 머리였던 큰 딸 제니였다. 19세의 바그너는 제니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모든 것을 갖춘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았던 바그너의 사랑이 아주 컸던 만큼 바그너의 상대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제니는 바그너에 대해 전혀 호감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놀리느라고 그랬는지 제니와 여동생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수 많은 귀족, 상류층 남자들과 어울리며 불장난을 했다. 결국 제니에 대한 바그너의 사랑은 미움으로 변했다. 그래서 제니의 ‘가벼움과 천박한 인생관’을 저주하다가 자신이 이제껏 화려한 백작의 저택에서 환상적인 ‘달빛 아래의 쇼’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제니에 사랑이 깨진 뒤로 무거워진 마음과 그 기념품이 된 ‘결혼’의 대본을 들고 바그너는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치히]]로 향한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 7중주 한 곡과 ‘결혼’의 첫 장면음악을 작곡하였고, 스승이던 바인리히는 바그너의 솜씨를 인정했다. 그러나 바그너와 가장 가깝게 지낸 누나이자 여배우인 로잘리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그너는 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될 가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원고를 없애버린다. 프라하에 잠시 머물면서 ‘결혼’의 대본을 쓰고 있을때 바그너의 ‘교향곡 C장조’가 프라하 음악원 학생들에 의해 연주된다. 또 얼마 뒤 ‘교향곡 C장조’는 라이프치히에서 두번 더 연주되었고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을 얻어냈다. [[1833년]] 1월의 두번째 공연 때 이 작품을 좋게 소개한 사람은 ‘우아한 세계의 신문’ 편집인이던 하인리히 라우베였다. 이 신문은 [[1830년대]]에 ‘젊은 독일’로 알려진 과격파 운동의 중심이었고, 이 문예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라우베는 바그너의 누나 로잘리의 친구로 독일 예술을 학문과 고전의 굴레에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라우베의 진지함과 대담함 그리고 정의감에 감탄하였고 그의 영향은 바그너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다. 바그너의 교향곡에 감명 받은 라우베는 자신이 막 완성한 오페라 대본을 주었다. 원래 이 대본은 당시의 유명 작곡가였던 [[마이어베어]]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으며, 마이어베어는 몇 년 후 바그너를 몇 번 도와주게 된다. 이 제의에 대해 바그너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대본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뒤였다. 그리고 실제로 바그너는 평생동안 한번도 다른 사람의 대본을 써서 작곡하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000000><:>[[오페라|{{{#white '''20살 바그너가 최초로 완성한 오페라 ‘요정’'''}}}]]|| || {{{#!folding [ 영상 펼치기 · 접기 ] ||[youtube(FzhEAoirn4o)]||}}} || 이때 쯤 바그너는 최초로 완성한 오페라 ‘요정’(Die Feen)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카를로 고치의 희곡 ‘뱀 여인’ La donna serpente)을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연히 형 알베르트의 제의로 [[뷔르츠부르크]]의 코러스마스터 자리도 맡게 되었다. 이 일을 맡은지 한달 뒤인 1833년 2월에 바그너는 ‘요정’의 대본을 완성했고 그 다음해 1월에는 작곡도 완료했다. ‘요정’은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초자연적이며 환상적인 면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런 유행은 베버의 오페라와 호프만의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요정’의 플루트에는 금지된 질문이나 사랑을 통한 구원 등 나중에 바그너가 사용한 소재가 들어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folding [ 내용 정보 펼치기 · 접기 ] 아린달(Arindal)이라는 왕자는 아다(Ada)라는 요정을 사랑한다. 그래서 결혼하지만 요정은 자신의 정체를 물으면 안 된다고 한다. 아다도 왕자와 결혼하여 살고 싶지만 그러려면 왕자가 어떤 유혹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결국 궁금증이 생겨 묻게 되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래서 여러 끔찍한 시련을 겪는 동안 왕자는 그녀를 저주하게 되고 여자는 돌로 변한다. 상심한 왕자는 그녀를 따라 하계로 가서 자신의 리라가 가진 마법으로 그녀의 생명을 되찾고 두 사람은 요정의 세계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 || 이 첫 번째 오페라에서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 틀 내에서 재능을 발휘한다. 전통적인 레치타티브, 아리아, 듀엣, 합창 등에는 ‘라인의 황금’ 전까지의 다른 작품들에 나타나는 음악이 기본이 들어있다. 그리고 단순한 동기를 다시 사용하다던가 잘 장식된 [[관현악]] 부분이 나오는 등 나중에 바그너의 특징이 될 부분이 확실하게 들어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도 명작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작품이 너무나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이어서 그랬는지 무시해버렸고 나중에 바이로이트 캐넌에서 빼버린다. 뷔르츠부르크에서 ‘요정’을 작곡할 무렵 바그너는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가난한 지방극장에서 자기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처음 맡았던 일 중 하나는 하인리히 마르쉬너의 ‘흡혈귀’에 출연하는 합창단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그 작품에서 형이 알베르트가 부를 끝 장면인 아리아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오페라하우스의 실무에 대해 많이 배웠고 또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많이 접했다. 그리고 바그너 자신이 첫연애라고 말한 연애도 했다. 상대는 합창단의 소프라노 테레제 링겔만이었다. 이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로맨틱한 불장난의 재미를 알았고 평생동안 이 재미를 추구했다. 1834년 1월에 바그너는 완성된 ‘요정’ 악보를 들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갔다. 그는 이 작품이 대히트를 칠 것으로 기대했지만 라이프치히 극장의 매니저였던 프란츠 하우저는 바그너의 누나 로잘리가 잘 애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의 공연을 거부했다. ‘요정’은 바그너가 죽은지 5년 뒤 1888년 뮌헨에서 초연된다. 바그너의 실망은 매우 컸다. 하지만 바그너는 새로운 예술경험을 통해 독일 오페라를 이탈리아 오페라와 비교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빌헬르미네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로미오로 출연한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의 공연이었다. 그 공연을 본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가진 소리의 아름다움에 이끌렸고 1834년 6월 ‘아름다운 세계의 신문’에 첫 에세이를 쓴다. ‘독일 오페라’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바그너는 학구적인 면에 치중하는 쉬포어, 마르쉬너 등의 독일 작곡가를 공격하면서 따듯하고 표현적이며 정열이 가득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벨리니를 찬양했다. 벨리니는 바그너의 영웅 대열에 끼였고, 바그너는 노래가 가진 감정적 힘을 알게 해 준 이 이탈리아 작곡가를 평생토록 좋게 생각했다. 벨리니의 음악에 도취한 이 시기에 바그너는 친구 테오도르 아펠과 함께 보헤미아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오페라 ‘연애 금지’의 줄거리 개요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를 적당히 각색학 작품이지만, 바그너는 여기에 이탈리아식의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을 붙이게 된다. ||<#000000><:>[[오페라|{{{#white '''바그너의 두번째 완성작 오페라 ‘연애 금지’'''}}}]]|| || {{{#!folding [ 영상 펼치기 · 접기 ] ||[youtube(oBAB40dO1xU)]||}}} || 보헤미아에서 돌아온 바그너에게는 [[마그데부르크]]에 본거지를 둔 하인리히 베트만의 순회공연 극단의 음악감독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공연은 1834년 7월에 바트 라우흐슈타트에서의 여름 시즌이었다. 별로 이름없는 배우들로 이루어진 이 극단에 들어온지 일주일만에 바그너는 모차르트의 ‘돈 죠바니’로 오페라 지휘에 데뷔했다. 충분히 연습도 못했지만 이 공연에 대해서는 모두 만족했다. 바트 라우흐슈타트의 숙소에 머무르던 바그너는 여배우였던 민나 플래너를 만나게 되고 곧 사랑에 빠졌다. 짙은 눈의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민나는 바그너보다 4살 연상이었고 뛰어난 용모 덕분에 누구나 무대에서 성공할 것을 믿었다. 따라서 많은 극장 매니저들과 후원인들이 따랐는데 물론 가끔 ‘점잖치 못한’ 의도와 제의나 후원도 있었지만 민나는 그런것도 뿌리치지 않았다고 한다. 민나는 15세 때에 육군 장교였던 에른스트 루돌프와 원조교제 후 나탈리라는 딸을 낳았으며 동생이라고 속이며 키우고 있었다.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이해 못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여자”라고 잔뜩 불만을 토로하며 민나의 “신선하고 뛰어난 외모에만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서전을 썼을 당시에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 코지마에 대한 고려였다고 많은 비평가들이 추측한다. 당시 바그너가 민나와 친구 테오드르 아펠에게 보낸 여러 편지속에는 바그너가 민나에 대해 깊은 사랑을 느꼈고 절대로 민나를 잃지 않겠다는 결심하는 문구가 가득하다. 순회극단이 마그데부르크로 옮겨간 1834년 후반 바그너와 민나도 함께 갔고, 다음해까지 바그너는 지휘도 하면서 ‘연애 금지’를 작곡하느라 바빴다. 특히 1835년 4월에는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바그너의 지휘로 몇 번 노래했는데, 당시 바그너는 열심히 노력하는 지휘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극단은 점점 어려워져서 1836년 3월 29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연애 금지’를 초연한 직후 극단은 해산된다. 말이 초연이었지 표를 산 관객은 모두 세 사람이었고 그나마 막이 오르기 직전에 무대 뒤에서는 프리마돈나의 남편과 남자 주연배우의 주먹싸움이 벌어진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다시 쾨니히슈타트 극장에서 공연하려고 베를린에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평생토록 빛을 보지 못한다. 이후 바그너는 민나가 출연계약을 맺은 [[쾨니히스베르크]]로 갔다. [[1836년]] [[11월 24일]], 바그너와 민나는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의 트라크하임 교회에서 [[결혼]]한다. 양쪽 모두 생각없이 급히 한 이 결혼은 처음부터 불안했고 돈과 여러가지 문제로 난관에 이른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것에 짜증이 났던 민나는 [[1837년]] 5월말에는 디트리히라는 사업가와 몰래 [[드레스덴]]으로 달아난다. 질투로 분노한 바그너는 즉시 따라갔고 눈물로 민나를 설득하여 자신이 안정된 직업을 얻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답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지 바그너는 6월에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리가(Riga)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게 됐다. 리가는 [[라트비아]]의 [[발트해]]에 있는 역사 깊은 항구로 독일인들이 많은 사는 곳이었다. 8월에 이곳에 도착한 바그너는 이 새로운 환경이 자신에게 새로운 창작열을 키워줄 것이며 결혼도 살릴것으로 기대했다. 곧 민나에게서 용서를 비는 편지가 왔고 10월에 다시 바그너에게 돌아왔다. 야심만만한 바그너는 리가에서 새로운 음악회와 극장의 개혁으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리가 극장의 단장이던 칼 폴 홀타이는 이에 반대했고 바그너의 적이 된다. 리가에 있는 동안 바그너는 새로운 그랜드오페라의 대본과 작곡을 시작했다. 그가 1837년 여름에 읽은 에드워드 불워 리튼의 소설 ‘리엔치’(Rienzi)였다. 1839년 여름 홀타이 단장은 불미스러운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리가를 떠나게 됐고 바그너 역시 직업을 잃게 된다. 다시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된 바그너는 몰래 러시아 국경을 달아나서 [[파리(프랑스)|파리]]로 간다. 멀리 떨어진 촌구석의 소극장과 달리 대도시 파리에 가면 자신의 새로운 오페라를 알아줄 것이고 돈과 명예도 따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채]]가 많은 바그너, 민나 부부의 여권을 당국이 압수 보관중이었기 때문에 바그너는 리가에서 달아나기 위해 정상적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옛 친구이던 아브라함 뮐러의 도움을 받아서 바그너 부부는 러시아 국경을 불법으로 넘기로 했다. 국경에는 코사크 순찰병들이 돌아다니면서 수상한 자를 보면 사살했기 때문에 아주 위험했다. 바그너와 민나 그리고 그들이 키우던 뉴펀들란산 강아지 로버는 밀수업자들의 동굴에서 저녁까지 기다리다가 밤에 국경을 넘어 [[프로이센]]으로 갔다. 다행히도 순찰에 눈에 띄지 않았고 거기세 필라우 항구까지 엉성한 마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마차가 전복되어 민나는 부상을 당한다. 필라우에서 바그너 부부와 강아지는 테티스라는 선원 7명의 작은 범선을 타고 런던으로 향한다. 그러나 항해 일주일 뒤 강한 [[폭풍]]에 밀려 [[노르웨이]]의 표르드 해안에서 폭풍을 피하는 동안 산드비크라는 작은 어촌에 머무른다. 나중에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이 곳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표르드 해안의 절벽에 메아리치는 것을 듣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선원들 노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폭풍은 계속됐지만 테티스 호는 결국 [[1839년]] 8월 [[영국]]에 닿았고 바그너 일행은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에서 바그너는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 조지 스마트 경을 찾아갔다. 바그너는 이미 그에게 ‘룰 브라타니아’(영국이여 지배하라)라는 서곡의 악보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 런던에 없었다. 바그너는 하는 수 없이 ‘리엔치’의 작가 불워 리튼을 찾았지만 그 역시 없었다. 그래서 바그너와 민나는 며칠 관광을 하고는 [[프랑스]]로 간다. 증기선으로 해협을 건넌 바그너 일행은 불루뉴에서 거의 한 달간 머물렀다. 우연히도 당시 파리 오페라를 주름잡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가 불루뉴에 살고 있었고, 당시 그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은 단순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 중산층 입맛에 딱 맞아 대성공을 거둔 때였다. 바그너는 나중에 마이어베어를 공격하지만 1839년 당시에는 아주 부러워했다. 바그너는 당시에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깊이가 얄팍하지만 그의 대성공에 감명받아 독일 음악가들이 드라마틱한 그의 음악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 마이어베어와 만난 자리에서 바그너는 ‘리엔치’ 대본을 3막까지 낭독했고 마이어베어는 참을성있게 들어줬다. 그리고 2막까지의 오케스트라 악보를 검토해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바그너에게 파리 오페라 단장이던 샤를르 뒤퐁셀 앞으로 보내는 추천장도 써준다. 이런 행운에 힘을 얻은 바그너는 부인과 함께 불루뉴를 떠났고 1839년 9월 17일 파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바그너의 첫번째 파리 방문은 가난과 실망의 연속이었고 앞으로 나올 바그너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끼친다. 2년 반이라는 세월동안 바그너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는데 실패한다. 바그너는 돈과 안면 없이는 유명한 마이어베어의 추천장이라고 해도 파리 오페라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퐁셀 단장은 바그너를 그저 희망에 가득한 젊은 작곡가로 취급했고 두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너는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기위해서 유명한 가수들이 부를 노래들을 작곡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정장을 하고 정식으로 소개를 받아 사교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란츠 리스트]]가 파리의 샬롱과 사교계의 맨 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바그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것도 아니었고 태도도 거칠고 무뚝뚝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고생스럽기는 했으나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페흐트를 비롯하여 주위에 모이는 몇 친구들은 바그너가 가진 투지와 날카로운 유머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면에 매료된다. 1839년에는 바그너가 라이프치히에서 사귄 신문사 친구 라우베가 파리에 왔다. 그는 자기 아내를 소개했고 또 바그너가 좋아하던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도 소개한다. 바그너가 모인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려고 자기가 고생스럽게 탈출하여 항해한 애기를 했고 냉정한 하이네도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1840년]] 3월 르네상스 극장으로 마이어베어의 추천으로 바그너의 ‘연애 금지’를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극장은 그 다음달에 [[파산]]으로 문을 닫는다. 이에 대해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마이어베어가 파산 소식을 알고도 자신을 속였다고 불평한다. 그 후 바그너는 출판업자 모리스 슐레징거에게서 일자리를 얻어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편곡하는 일을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살며 ‘리엔치’ 작업을 계속한다. 이 작품은 바그너가 이전에 만든 어떤 작품보다도 큰 것이었고 파리를 떠날 무렵에는 거대한 분량으로 늘어난다. '리엔치’ 작곡을 끝내던 1840년 11월은 바그너의 재정 상태가 최악이던 때였다. 10월에 부인 민나가 테오도르 아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빚쟁이들의 감옥 속에 갇혀 오페라를 쓰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펠에게 돈을 얻기 위해 과장했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000000><:>[[오페라|{{{#white '''바그너의 세번째 오페라 ‘리엔치’'''}}}]]|| || {{{#!folding [ 영상 펼치기 · 접기 ] ||[youtube(VTwm0_-fsZ4)]||}}} || 바그너는 ‘리엔치’를 처음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타일로 쓴 그랜드오페라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제까지의 어떤 그랜드오페라 작품보다도 더 요란하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 전형적인 [[19세기]] 중반의 요란한 그랜드오페라인 5막짜리 ‘리엔치’는 실제로 바그너의 일생동안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1841년]] 6월 드레스덴에서 이 작품 공연을 수락하고 궁정극장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842년 10월 20일 초연에서 6시간동안 공연된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바그너 본인은 이 작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1845년]]부터는 ‘[[괴물]]’이라고 부른다. 리엔치는 수작이라고 평가를 받으나 마이어베어와 스폰티니의 향이 너무 짙어 정통적인 바그너 음악극의 계보에 넣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